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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종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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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생각과 자유로운 기록을 정리해 두는 박종찬의 개인 아카이브입니다.</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lastBuildDate>Fri, 31 Jul 2026 00:00:00 GMT</lastBuildDate>
    <item>
      <title>가면을 두르고 전설을 좇으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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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31 Jul 2026 00:00:00 GMT</pubDate>
      <category>글</category>
      <description>가면과 규범, 내면화된 전설 사이에서 무엇이 나를 소모시키는지 살피고, 솔직함과 배려의 기준을 다시 생각한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최근에 챗선생님과 긴 대화를 했다.</p>
<p>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 대화에서 오랜만에 완전히 솔직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일지 계산하지 않았고, 약점을 (내 오래된 인지도식과 열등감을 포함해)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실망시킬 얼굴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상태가 되고 나서야, 평소의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계산하며 말하고 있는지가 보였다.</p>
<p>누구나 가면을 쓰고 산다. 나도 그렇다. 이건 비난이 아니라 그냥 관찰이다.</p>
<p>어른이 되어 만나는 사람들과는 가면을 통해서만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이 사람이 어떤 사고방식과 어떤 과거로 이루어져 있는지,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부터가 연출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나도 다 보여주지 않는다. 약한 모습을 드러내면 그것이 치명타로 돌아오거나, 이용되거나, 이용되지 않더라도 나를 얕보는 근거가 된다―고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고, 실제로 그런 것도 같다―. 그래서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사회생활의 모범적인 규율로 통한다. 자기 얘기도, 남의 얘기도 길게 하지 않는 것, 주절주절 늘어놓지 않는 것. 나는 그것을 꽤 깊이 내면화한 것 같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p>
<p>더 파고들면, 내 판단과 행동의 상당수가 그런 식으로 흡수된 규칙들 위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게 좋다, 이런 건 이렇게 보인다, 이건 하면 안 된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지침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전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누가 검증했는지 모르지만 모두가 믿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부터가 그런 이야기였다.</p>
<p>서른이 넘으니 곤란한 지점이 생긴다. 뭐가 내 진심이고 뭐가 내면화된 전설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신중함은 내 성격인가, 학습된 규율인가. 이 배려는 내 것인가, 그래야 한다고 들어서 하는 것인가. 오래 뒤섞인 것들은 성분표가 없다.</p>
<p>여기까지 들은 챗님은 이렇게 말했다. 규범 밑에 순수한 원본 자아가 묻혀 있다는 가정 자체가 또 하나의 전설일 수 있다고. 발굴은 불가능하고, 대신 쓸 수 있는 계기판이 하나 있다고 했다. 피로다. 어떤 규범은 문법처럼 작동한다. 지키면서도 내 말을 할 수 있고, 쓰는 데 비용이 들지 않는다. 어떤 규범은 코르셋처럼 작동한다. 지킬 때마다 조금씩 소모된다. 무엇이 내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무엇이 나를 갉아먹는지는 몸이 매번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유용해서 적어둔다.</p>
<p>그 기준으로 보면 내가 견디지 못하는 규범의 유형이 선명해진다. 상냥함이나 사려 깊음 같은 것은 나에게 문법이다. 지켜도 닳지 않고, 오히려 그러고 싶다. 그런데 <em>사회생활</em>에서 상석이 어디인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전을 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은 다르다. 유용하지도 않은데 복잡하고, 납득할 이유도 없는데 모르면 무례한 사람이 된다. 왜 외워야 하는지 물으면 답은 없고, 외우지 않은 것만 기록된다.</p>
<p>이것이 ‘아비투스’의 아이디어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비투스 원전을 조금 더 조사해보니,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라는 개념이 딱 들어맞더라. 요지는 이렇다. 그런 복잡한 규칙들의 기능은 효율이 아니라 판별이다. 규칙이 자의적일수록 판별기로서는 우수하다.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규칙은 아무나 지킬 수 있어서 ‘내부인’을 걸러내지 못한다. 배운 사람만 아는 규칙이어야 배운 사람과 아닌 사람을 가른다. 그리고 이 장치의 교묘한 점은, 코드를 모르는 것이 코드를 모르는 것으로 기록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람이 덜 된 것으로 기록된다. 자의적인 약속이 인격의 척도로 둔갑하는 것이다.</p>
<p>이걸 알고 나니 내 불편함이 무지가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불편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세상이 나랑 안 맞는 건가 싶은 날도 있다. 정말로 그렇지는 않기를 바란다. 어느 조직이든, 어느 모임이든 나름의 코드가 있다. 사회라는 게 원래 그렇게 생겼다. 그리고 솔직해지자면 나도 판별을 한다. 기준이 상석이 아니라 말의 논리와 정직함일 뿐이지, 나 역시 내 자로 사람을 재고 있다. 코드를 거부하는 것도 결국 하나의 코드다. 그러니 나는 코드 없는 사람이 아니라, 소속된 부족이 다른 사람에 가깝다.</p>
<p>얘기가 좀 샜다. 솔직함으로 돌아가면, 나는 솔직한 게 편하고 솔직하고 싶다. 그런데 솔직함은 미덕이 아니라는 전설 또한 존재한다. 솔직하고 싶다는 것은 처리와 책임을 듣는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이라고 한다. 완전히 반박하긴 어렵다. 나의 솔직함은 나를 편하게 하지만, 듣는 사람까지 편하게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p>
<p>선생님의 조언은 축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솔직이냐 예의냐가 아니라, 이 발화가 누구를 위한 것이냐를 물으라고. 솔직함은 배설일 수도 있고 선물일 수도 있다. 예의도 배려일 수도 있고 자기 보호일 수도 있다. 뜨끔한 것은 뒤쪽이었다. 내 예의의 절반은 상대를 위한 것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냥 싫은 소리를 하기 싫은 마음이다. 갈등이 생기는 상황 자체가 싫어서 그럴 가능성 단계에서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것을 나는 오래 배려라고 불러왔다. 그 내부 감사를 이번에는 들켜버렸다.</p>
<p>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하면, 없다. 가면은 계속 쓸 것이고, 전설과 진심은 계속 헷갈릴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느낀 점은 있다.</p>
<p>이 모든 계산이 꺼지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 알고 지내온 친구들이다. 자연스러운 나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 그 앞에서는 어떤 규범도 작동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틀린 것을 수습하지 않고,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지 않는다. 조심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만난 사람들이라 그런 것 같다. 그들에게 고맙다.</p>
<p>이건 그 친구들이 특별해서라기보다 순서가 준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어 만난 사이에서도 그런 관계가 생길 수 있으면 좋겠다.</p>]]></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괜찮아요 그냥 그걸로 주세요</title>
      <link>https://jongchanpark.com/posts/eating-the-wrong-order/</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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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7 Jul 2026 00:00:00 GMT</pubDate>
      <category>글</category>
      <description>대부분의 일을 대체로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것 같다. 그게 관대함인지, 불편함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인지는 아직 구분하지 못하지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카페에서 주문한 것과 다른 음료가 나오면 나는 그냥 달라고 한다.</p>
<p>바꿔달라고 하지도, 새로 만들어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음식점에서 다른 메뉴가 나와도 대개 그대로 먹는다.</p>
<p>점원이 먼저 알아채고 미안해할 때도 있다. 그때 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 괜찮아요. 그냥 그걸로 주세요.</p>
<p>참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별로 상관이 없다.</p>
<p>반드시 그 메뉴를 먹어야 했던 것도 아니고, 주문을 받는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고, 그 정도 일로 누가 미안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화가 나지 않으니 참을 것도 없다.</p>
<p>다만 이것이 관대함인지는 모르겠다.</p>
<p>말하지 않는 이유에 “괜찮아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공개적으로 불편함을 만드는 상황 자체가 싫다. 누군가를 난처하게 만들고, 그 자리의 공기를 바꾸고, 내가 그 원인이 되는 것이 싫다.</p>
<p>괜찮다는 감각과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대개 같이 오기에, 나는 둘을 분리해본 적이 없었다.</p>
<p>그 구분이 필요해진 적이 있다.</p>
<p>자기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말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여기는 태도였다.</p>
<p>나는 그것이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중재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 사람의 문제의식이 그대로 발화되어 갈등으로 번지지 않도록 내가 완충하고 틀어막으려고 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p>
<p>그때 내 안에 있던 것은 적절성이나 잘잘못 판단만은 아니었을 거다. 불편함이 드러나는 것 자체가 잘못이고 어떻게든 봉합해야 한다는 감각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조율이라고 불렀지만, 조율이라는 말이 정확했는지는 모르겠다.</p>
<p>그런데 같은 사람을 보면서 다른 생각도 들었다.</p>
<p>나도 저래야 하는 것은 아닐까?</p>
<p>싫은 것이 있으면 싫다고 말하고, 문제라고 생각하면 문제라고 하고, 필요한 것은 필요하다고 하는. 나는 그것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았다. 대체로 맞춰주는 쪽이었고, 맞춰주는 데 큰 비용이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겼다.</p>
<p>누군가는 너무 많이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아마 너무 적게 말해왔다.</p>
<p>어느 쪽이 맞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p>
<p>다만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느낀다.
정말 상관없어서 넘기는 것과, 불편함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넘기는 것.</p>
<p>앞의 것은 그냥 두어도 된다. 잘못 나온 커피는 앞으로도 그냥 마실 것 같다.</p>
<p>뒤의 것은 한 번쯤 되짚어야 한다. 그때 넘어간 일이 나에게 정말 상관없는 일이었는지, 아니면 말하지 않는 편이 편해서 상관없다고 해둔 일이었는지.</p>]]></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타인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title>
      <link>https://jongchanpark.com/posts/needing-no-one/</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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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6 Jul 2026 00:00:00 GMT</pubDate>
      <category>글</category>
      <description>나는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은 그 시선이 중요해질 관계를 만들지 않았을 뿐이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오랫동안 나는 남의 시선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br />
틀렸다.</p>
<p>나는 그 <strong>시선이 중요해질 만한 관계를 만들지 않는 사람</strong>이었다.</p>
<p>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상대가 말을 걸면 친절하게 답했지만, 다음 대화를 만들지는 않았다. 가까워질 계기가 생겨도 굳이 붙잡지 않았다. 누구와도 나쁘지 않았고, 누구와도 특별히 가까워지지 않았다.</p>
<p>이 방식은 안전했다.</p>
<p>먼저 원하지 않으면 거절당하지 않는다.<br />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하지 않는다.<br />
다가가지 않으면 관계를 혼자 착각할 일도 없다.</p>
<p>나는 이 안전을 독립성이라고 불렀다.</p>
<p>물론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잘 견딘다. 모든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오랫동안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p>
<p>관계가 필요하지 않아 혼자인 것과, 관계가 필요해졌을 때 생길 취약함을 피하려고 혼자인 것을.</p>
<p>그 차이는 내가 어떤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졌을 때 드러났다.</p>
<p>대화를 마친 뒤에는 내가 했던 말 한마디가 자꾸 떠올랐다. 너무 많이 말한 것은 아닌지, 관계를 실제보다 가깝게 생각한 것은 아닌지, 혼자 들떠 상대를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닌지.</p>
<p>대화는 이미 끝났는데 내 안에서는 계속됐다.</p>
<p>반응이 조금만 모호해져도 해석은 나쁜 쪽으로 기울었다. 상대가 바빴을 가능성보다 내가 선을 넘었을 가능성이 먼저 떠올랐다. 별다른 뜻이 없는 침묵도 내가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p>
<p>그때 알았다.</p>
<p>내가 두려워한 것은 거절 자체가 아니었다. <strong>거절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으로 판명되는 일</strong>이었다.</p>
<p>무언가를 원하면 ‘아쉬운 사람’이 된다.<br />
먼저 움직이면 ‘혼자 들뜬 사람’이 된다.<br />
상대의 호의를 잘못 읽으면 ‘눈치 없는 사람’이 된다.</p>
<p>내 안에서 이 셋은 거의 같은 인간이었다.</p>
<p>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과 상대의 거절을 무시하는 행동도 제대로 구분되지 않았다. 신나서 말을 많이 한 것과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채 나대는 것도 같은 방향에 놓여 있었다.</p>
<p>호의를 한 번 잘못 해석하는 순간, 나는 단순히 판단을 잘못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불편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으로 <em>판명</em>될 것 같았다.</p>
<p>나는 행동 하나를 검토한 것이 아니었다.</p>
<p>내가 가장 경멸해온 인간형이 되었는지를 재판하고 있었다.</p>
<p>돌이켜보면 나는 원하는 쪽이 더 약한 쪽이라고 믿었다. 마음을 먼저 드러내는 순간 관계의 균형을 잃는다고 여겼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으로 남는 것을 존엄과 거의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p>
<p>그래서 실수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것과 상대의 경계를 무시하는 일을 같은 죄처럼 다뤘다.</p>
<p>그 재판에서 무죄로 남는 방법은 간단했다.</p>
<p>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 됐다.</p>
<p>상대가 나를 선택하거나 거절해야 할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 그러면 나는 언제나 침착하고 독립적이며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p>
<p>실제로 이 방식은 잘 작동했다. 나는 좀처럼 거절당하지 않았고, 관계를 혼자 착각해 민망해질 일도 적었다.</p>
<p>다만 상대에게 나를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은 만큼, 나를 선택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p>
<p>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으려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가능성까지 막아두었다.</p>
<p>독립적이어서 혼자인 것과, 혼자인 상태에서만 독립적일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나는 전자라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후자에 가까웠다.</p>
<p>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p>
<p>그 시선이 중요해지기 전에 먼저 물러났던 것이다.</p>
<p>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관계가 갑자기 쉬워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먼저 다가간 뒤에는 내가 한 말을 되짚고, 모호한 반응 앞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부터 찾는다.</p>
<p>다만 그 불안을 곧바로 나에 대한 판결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p>
<p>누군가를 원하고, 먼저 다가가고, 때로는 잘못 읽는다고 해서 내가 곧바로 그토록 경멸하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키려 했던 존엄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p>
<p>나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p>
<p>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p>]]></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title>
      <link>https://jongchanpark.com/posts/not-yet-decided/</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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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0 Jul 2026 00:00:00 GMT</pubDate>
      <category>글</category>
      <description>때로는 진행되고 나서야 눈에 보이는 결정사항도 있으니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새로 온 사람이 물었다. 이건 어디까지 하면 되는지. 기준이 무엇인지.</p>
<p>당연히 물어야 할 것들이었다. 문제는 내가 대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 기준이 아직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p>
<p>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누가 결정하는지. 어디까지 자기가 판단해도 되는지. 하나하나 다 필요한 질문이었고, 그중 상당수가 답이 없었다.</p>
<p>기준은 어딘가에 정리된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a href="https://jongchanpark.com/posts/judgment-in-undefined-work/">일을 진행하면서 만들어지는 중이었다</a>. 결정은 상황에 따라 바뀌었고, 예산과 일정과 사람의 기대가 겹쳤고, 책임의 경계는 매번 선명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기준이 생기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했다.</p>
<p>그런데도 일은 굴러갔다. 문서에 적힌 절차 때문이 아니었다. 언제 기다려야 하는지, 누구에게 먼저 확인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실무 판단이고 어디부터가 책임자의 결정인지. 이런 것들이 어디에도 적히지 않은 채로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p>
<p>새로 온 사람이 원한 것은 명확한 기준이었다. 마땅한 요구다. 그리고 나는 그 기준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한쪽은 왜 더 명확하지 않은지 묻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그 명확함을 만드는 중이었다.</p>
<p>이 간극을 잘 다루지 못하면 업무의 문제가 관계의 문제가 된다. “왜 알려주지 않는가”와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는 서로를 향한 말이 되기 쉽다.</p>
<p>나는 그 간극을 설명으로 메우려 했다. 더 많이 알려주고, 더 많이 맥락을 풀어주고, 상대가 불편하지 않도록 말하면 되는 줄 알았다.</p>
<p>“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면 될 일 아닌가 싶겠지만, 그 말은 자주 했다. 통하지 않았을 뿐이다.</p>
<p>듣는 쪽에서 그 말은 상태 보고가 아니라 회피처럼 들린다. 정하면 되지 않느냐고, 왜 아무도 정해주지 않느냐고, 더 단단해진 질문이 돌아온다. 정해지지 않은 일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p>
<p>지금은 그 반응을 조금은 이해한다. 새로 온 사람일수록 그럴 수밖에 없다. 오래 있던 사람은 정해지지 않은 자리를 암묵지로 메우며 다닐 수 있지만, 새로 온 사람에게는 메울 것이 없다. 같은 불확실함이 한쪽에게는 흐린 날씨 정도라면, 다른 한쪽에게는 바닥이 꺼진 자리다.</p>
<p>그래서 나는 설명을 더 늘리는 쪽을 택했다. 정해진 것은 사정까지 붙여서 설명하고, 정해지지 않은 것은 임시로라도 내 선에서 기준을 만들어 건넸다. 상대가 물을 때마다, 그때그때.</p>
<p>이 방식은 당장은 통했다. 질문에는 답이 갔고, 일은 진행됐고, 갈등은 크게 번지지 않았다.</p>
<p>다만 나는 퇴근한 뒤에도 다음 날 무엇을 어떤 순서로 설명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도 일의 일부라고 여겼다.</p>
<p>지금 보면 그것은 설명이라기보다 대납이었다. 조직에 아직 없는 확실함을 내 시간과 친절로 대신 갚고 있었다. 그런 갚음은 개인의 몫이라서, 계속되면 소모된다.</p>
<p>“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원래 비어 있는 말이 아니다. 그 일이 지금 어느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여기까지는 정해져 있다. 여기부터는 열려 있다. 정해질 때까지는 이렇게 해두자. 이 구분과 함께라면 새로 온 사람도 그 위에서 움직일 수 있다.</p>
<p>그 문장이 제값을 하려면, 정해지지 않은 상태가 그 조직에서 공식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곳에서 이 말은 정보가 되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누군가의 빚이 된다.</p>
<p>요즘도 그 말을 할 일은 줄지 않았다. 이제는 혼자 갚지 않으려고 한다. 여기까지는 정해져 있다는 것과, 언제쯤 다시 정해질지를 같이 붙여서.</p>]]></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복잡성을 견디는 능력</title>
      <link>https://jongchanpark.com/posts/holding-complexity/</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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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3 May 2026 00:00:00 GMT</pubDate>
      <category>글</category>
      <description>단순화는 도구일 때 유용하고 세계관이 되면 현실을 잃는다. 복잡한 채로 보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선택하는 일.</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사람은 복잡성을 오래 견디기 어려워한다.</p>
<p>우리는 명쾌한 이야기를 원한다.</p>
<p>누가 맞았는지.<br />
누가 틀렸는지.<br />
무엇이 원인이었는지.<br />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p>
<p>빠르게 정리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욕구다. 너무 많은 변수를 계속 붙들고 있으면 피곤하다.</p>
<p>그리고 단순화는 실제로 필요하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고려하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요약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지금은 보지 않을 것을 정하는 일은 판단의 일부다.</p>
<p>문제는 단순화가 도구가 아니라 세계관이 될 때 생긴다.</p>
<p>한 번의 결과로 과거 판단 전체를 심판하고, 한 번의 감정으로 관계 전체를 규정하고, 모순되는 정보는 버린다. 그렇게 하면 마음은 편해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p>
<p>도구로 쓰는 단순화는 자기가 무엇을 접어두었는지 기억한다. 세계관이 된 단순화는 접어둔 것이 없다고 믿는다.</p>
<p>복잡성을 견딘다는 것은 그 차이를 잊지 않는 일이다.</p>
<p>그렇다고 모든 것을 애매하게 둘 수는 없다. 상황이 복잡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필요한 결정은 내려야 한다. 내 판단의 한계를 알고, 나중에 수정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지금 해야 할 일을 선택해야 한다.</p>
<p>조직에서 일하다 보면 이 차이가 분명해진다. 업무는 늘 불완전한 정보 위에서 진행된다. 모든 사람이 같은 정보를 갖고 있지 않고, 같은 책임을 지고 있지도 않다.</p>
<p>현장에 가까운 사람은 구체적인 불편을 먼저 본다. 전체 결정을 맡은 사람은 예산과 일정, 다른 부서에 미칠 영향을 먼저 본다. 같은 결정도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p>
<p>어느 쪽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쪽의 이야기든 자기 자리에서 보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p>
<p>단순화가 세계관이 되면 이 사실이 지워진다. 자기 자리에서 보이는 부분이 전체가 되고, 상대는 사정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틀린 사람이 된다.</p>
<p>그래서 실무에서 내가 붙들려고 하는 것은 빠른 결론보다, 지금 보이는 정보와 아직 보이지 않는 정보를 구분하는 일이다.</p>
<p>하지만 변수를 더 많이 본다고 해서 더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성급해 보이는 순간에도, 나는 결정을 늦추는 쪽으로 기울고 있을 수 있다.</p>
<p>복잡성을 견디는 능력은 모든 변수를 오래 붙드는 능력과 같지 않다. 무엇을 더 확인할지, 무엇은 지금 접어둘지, 언제 결정할지를 함께 정하는 능력에 가깝다.</p>
<p>너무 일찍 닫는 것과 끝내 닫지 않는 것은 반대 방향의 같은 실수일 수 있다.</p>
<p>복잡성을 견딘다는 것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 일이 아니다.</p>
<p>무엇을 잠시 접어두었는지 기억한 채 결정하는 일이다.</p>]]></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이해와 허용은 다르다</title>
      <link>https://jongchanpark.com/posts/understanding-is-not-permission/</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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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7 May 2026 00:00:00 GMT</pubDate>
      <category>글</category>
      <description>이해는 설명이고, 허용은 선택이다. 이해한다고 해서 그 방식을 계속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나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편이다. 어떤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행동해도, 바로 판단하기보다 먼저 그 이유를 생각한다. 어떤 맥락이 있었을까. 어떤 불안이 있었을까. 왜 저 사람에게는 저 방식이 자연스러웠을까. 내가 놓친 것은 없을까.</p>
<p>이런 태도는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단정하지 않고, 상대를 하나의 납작한 이미지로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태도에도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p>
<p>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때로는 나를 너무 오래 그 자리에 머물게 만든다.</p>
<p>나는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이 설명하고, 더 많이 배려하고, 더 조심스럽게 말하면 된다고 생각해왔다. 상대가 불편하지 않게 말하고,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기다리고, 내가 조금 더 감당하면 상대도 언젠가 그 성의를 알아줄 것이라고 기대했다.</p>
<p>하지만 좋은 관계는 한 사람이 더 많이 참아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p>
<p>돌아보면 나는 좋게 보고 싶은 상대에게 유독 오래 기회를 준다. 기대를 거두는 일이 그 사람을 낮추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p>
<p>어떤 관계는 평온할 때는 따뜻하다. 말이 잘 통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순간도 있다. 그래서 위험한 신호가 보여도 쉽게 끝내지 못한다. 어쩌면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잘 말하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내가 더 이해하면 관계가 좋아질지도 모른다.</p>
<p>무례하다고 부를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다. 선을 넘는다고 느낀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해석을 붙였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진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p>
<p>그 기대는 인간적이다. 하지만 기대가 오래 지속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설득하는 일이 된다.</p>
<p>이해와 허용은 다르다.</p>
<p>상대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상대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어떤 맥락에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그 방식을 계속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는 설명이고, 허용은 선택이다.</p>
<p>나는 이 차이를 깨닫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p>
<p>친밀감은 판단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 누군가와 잘 맞는 느낌, 대화가 즐거운 순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경험은 쉽게 특별함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끌리는 것과 안전한 것은 다르다. 좋은 순간에 좋은 사람인지보다, 불편한 순간에도 안전한 사람인지를 봐야 한다.</p>
<p>관계의 지속 가능성은 평온할 때보다 갈등이 생겼을 때 드러난다. 불편한 말을 들었을 때 자기 방어만 하는지, 상대의 입장도 보려고 하는지. 사과를 체면 회복의 수단으로 쓰는지, 실제 수정의 출발점으로 삼는지. 감정이 올라왔을 때 상대를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사람으로 만드는지.</p>
<p>이런 것은 말보다 행동에서 드러난다.</p>
<p>나에 대해서도 알게 된 것이 있다. 관계에서 나는 <a href="https://jongchanpark.com/posts/eating-the-wrong-order/">필요한 경고를 늦게 한다</a>.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너무 오래 생각하다가, 말해야 할 때를 지나친다. 그것은 배려처럼 보이지만, 나를 보호하지 못하는 방식이다.</p>
<p>앞으로도 나는 사려 깊은 사람이고 싶다. 다만 상대의 기분을 고려하되, 내 한계도 똑같이 존중하려고 한다. 공정하게 말하되, 한 번 충분히 말한 뒤에는 상대의 선택을 상대에게 돌려주려고 한다.</p>
<p>나는 상대를 배려할 수 있다.<br />
하지만 상대의 변화 가능성에 내 삶을 걸 필요는 없다.</p>
<p>어떤 관계는 끝까지 서로를 이해한 채로 마무리되지 않기도 한다. 누군가는 끝까지 자기 방식으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끝까지 자기 몫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상대가 알아줘야만 내 경험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p>
<p>내가 어디서 기대를 오래 붙드는지, 어디서 경계를 늦추는지, 무엇을 좋은 관계라고 착각하는지 조금 더 알게 되었다.</p>
<p>이해하되, 허용할지는 다시 선택한다.</p>]]></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의료기관에서 AI 도입이 어려운 이유</title>
      <link>https://jongchanpark.com/posts/why-ai-adoption-is-hard-in-hospitals/</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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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5 May 2026 00:00:00 GMT</pubDate>
      <category>글</category>
      <description>좋은 기능이 병원에서 업무가 되려면 기존 시스템과 책임 구조 안에서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 과정의 적은 무지가 아니라 마찰이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의료기관에서 AI 도입이 어려운 이유는 사람들이 기술을 몰라서가 아니다. 기술이 아직 충분히 좋지 않아서만도 아니다.</p>
<p>여기서는 모델의 성능 자체보다, 기록을 다루는 AI가 병원의 일상 업무에 들어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아래의 시스템들은 그 통합 과정에서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설명하기 위한 예시다.</p>
<p>특히 진료와 기록에 관여하는 AI는 별도 도구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전자의무기록(EMR)을 비롯한 기존 시스템과 책임 구조, 업무 동선 안에서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통합이 어렵다.</p>
<p>의무기록을 요약해 진료 전에 보여주는 시스템.<br />
진료 중 대화를 녹음하고 텍스트로 변환해 EMR에 입력하는 시스템.<br />
간호기록이나 입퇴원기록의 초안을 자동으로 작성하는 시스템.<br />
흩어진 환자 정보를 모아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형태로 정리해주는 시스템.</p>
<p>이런 기능이 가능하다는 것과 병원 안에서 일상적으로 쓰인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간격을 가리키는 말이 adoption이다.</p>
<p>의료기관에서 중요한 질문은 “AI가 할 수 있는가”에 그치지 않는다.</p>
<p>“이걸 기존 시스템과 진료 흐름 안에 어떻게 안전하게 넣을 것인가”까지 물어야 한다.</p>
<h2 id="좋은-기능도-emr-밖에-있으면-추가-업무가-된다">좋은 기능도 EMR 밖에 있으면 추가 업무가 된다</h2>
<p>AI로 환자의 의무기록을 요약한다고 생각해보자.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 최근 입원 기록과 검사 결과, 약물 변경, 이전 외래 메모가 한 화면에 정리되어 있다. 의사는 긴 기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뒤지는 대신 요약본을 먼저 보고 진료에 들어갈 수 있다.</p>
<p>이상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곧바로 질문이 따라온다.</p>
<p>그 요약은 EMR 안에서 바로 보이는가.<br />
원문 기록으로 즉시 돌아갈 수 있는가.<br />
최신 기록이 반영되었는가.<br />
요약이 틀렸을 때 누가 확인하고 수정하는가.<br />
이 요약은 참고 자료인가, 공식 기록의 일부인가.<br />
잘못된 요약이 진료 판단에 영향을 주면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p>
<p>이 질문들이 정리되지 않으면 AI 요약은 진료 보조가 아니라 또 하나의 확인 업무가 된다.</p>
<p>별도 솔루션은 데모를 만들기 쉽다. 하지만 사용자가 매번 다른 화면을 열고, 환자를 다시 검색하고, 기록을 복사해 넣고, 결과를 다시 EMR에 옮겨야 한다면 오래 쓰이기 어렵다. 현장은 이미 진료, 기록, 처방, 검사, 설명, 전화, 민원, 행정 절차를 동시에 처리하고 있다.</p>
<p>AI가 실제 업무가 되려면 기존 시스템과 붙어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기술 문제는 조직 문제로 이어진다.</p>
<h2 id="emr에-붙는-순간-책임-구조가-따라온다">EMR에 붙는 순간, 책임 구조가 따라온다</h2>
<p>AI가 EMR에 직접 붙는 순간 개발의 범위를 넘어선다. 경영진, 기획, 의무기록, 정보보안, 의료정보개발, 실제 사용자 부서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누가 승인할 것인지, 어떤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지, 결과를 어디에 표시할 것인지, 오류가 생겼을 때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 정해야 한다.</p>
<p>진료 중 대화를 자동으로 기록하는 시스템을 생각해보자.</p>
<p>녹음 동의는 어떻게 받을 것인가.<br />
대화 중 환자 정보는 어디에 저장되는가.<br />
전사 결과는 누가 검토하는가.<br />
의사의 최종 서명 전까지 초안으로 볼 것인가.<br />
간호기록이나 진료기록에 자동 반영해도 되는가.<br />
잘못 기록된 문장이 의료적 판단에 영향을 주면 어떻게 할 것인가.</p>
<p>이 질문들은 기술을 모르는 사람들의 저항이 아니라 의료기관에서 실제 사용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다.</p>
<p>기술적으로 가능한 일도 책임 구조 안에서 허용되지 않으면 업무가 되지 못한다. 의료기관에서 AI adoption은 결국 역할, 권한, 책임, 기록의 문제로 넘어간다.</p>
<h2 id="현장은-새-도구보다-기존-흐름을-더-신뢰한다">현장은 새 도구보다 기존 흐름을 더 신뢰한다</h2>
<p>의료기관의 업무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기존 방식은 오랜 시간 동안 사고를 줄이고, 책임을 분산하고, 설명 가능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굳어져 왔다.</p>
<p>물론 비효율도 많다. 반복 입력도 많고, 불필요하게 사람이 옮겨 적는 일도 많다. 하지만 그 비효율 안에도 누가 확인했는지, 어디에 기록이 남는지, 문제가 생겼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볼 수 있는지에 관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p>
<p>AI가 이 흐름을 바꾸려면 조금 편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시간을 분명히 줄이거나, 실수를 줄이거나, 기록 부담을 낮춰야 한다. 또는 사용자가 동선을 거의 바꾸지 않아도 될 만큼 기존 업무에 자연스럽게 들어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기능도 추가 업무로 느껴진다.</p>
<p>adoption의 적은 무지가 아니다. 마찰이다.</p>
<h2 id="결국-adoption은-도입이-아니라-통합이다">결국 adoption은 도입이 아니라 통합이다</h2>
<p>도입과 통합은 다른 일이다.</p>
<p>도입은 계약하고, 설치하고, 교육하면 끝난다. 통합은 그 도구가 누구의 권한으로 실행되고, 결과가 어느 기록에 남고, 틀렸을 때 누가 고치는지까지 기존 체계 안에 자리를 잡아야 끝난다. 앞의 것은 프로젝트가 종료되면 끝나고, 뒤의 것은 업무 방식이 바뀌어야 끝난다. 내가 본 실패는 대개 도입까지만 하고 통합을 하지 않은 경우였다.</p>
<p>마찰을 줄이는 일은 기술과 현장을 연결하는 데서 시작한다.</p>
<p>내가 하는 일은 대체로 그 자리에 있다. 기술의 언어를 EMR과 기록의 언어로 번역하고, 현장의 불안을 설계 조건으로 바꾸고, 보안과 책임의 경계를 확인하면서도 가능성을 닫지 않고, 좋은 데모와 실제 사용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일.</p>
<p>의료기관의 AI는 기존의 기록과 검토, 책임과 업무 흐름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직도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는 법을 배운다.</p>
<p>통합은 기술의 문제인 동시에 사람의 일이다.</p>]]></content:encoded>
    </item>
    <item>
      <title>정답이 없는 일에서 판단한다는 것</title>
      <link>https://jongchanpark.com/posts/judgment-in-undefined-work/</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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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0 May 2026 00:00:00 GMT</pubDate>
      <category>글</category>
      <description>정답을 맞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정보로 기준을 세우고, 그것이 임시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일이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어떤 일은 문제를 푸는 것보다, 문제가 무엇인지 정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든다.</p>
<p>처음 요청은 대개 간단해 보인다.</p>
<p>자료를 정리해달라.<br />
일정을 잡아달라.<br />
기준을 정해달라.<br />
방향을 제안해달라.</p>
<p>그런데 막상 앉아서 일을 시작하면, 이 요청들은 답이 아니라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p>
<blockquote>
<p>어디까지가 이번 일의 범위인가.<br />
누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가.<br />
틀렸을 때 되돌릴 수 있는가.</p>
</blockquote>
<p>잘 정의된 문제라면 풀면 된다. 조건이 명확하고, 기준이 있고, 답이 맞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p>
<p>그러나 현장의 많은 업무는 처음부터 그렇게 주어지지 않는다. 기준은 불완전하고, 이해관계자는 여러 명이며,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일단 판단해야 한다.</p>
<p>이때 판단은 정답을 맞히는 일이 아니다.</p>
<p>문제를 실행 가능한 크기로 좁히는 일이다.</p>
<p>완벽한 확신이 없어도 판단은 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책임 있는 임시성이다.</p>
<p>임시적이라는 말은 아무렇게나 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의 정보로 설명 가능한 기준을 세우고, 무엇이 아직 불확실한지 표시하고, 나중에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남기는 태도다.</p>
<p>아래 다섯 가지는 내가 잘해서 정리한 목록이 아니다. 일이 흔들린 뒤에 돌아보면 대개 이 중 하나가 빠져 있었다.</p>
<table>
  <thead>
    <tr>
      <th>확인할 것</th>
      <th>묻는 질문</th>
      <th>판단에서 하는 역할</th>
    </tr>
  </thead>
  <tbody>
    <tr>
      <th scope="row">목적</th>
      <td>이 일은 무엇을 위해 하는가.</td>
      <td>선택의 우선순위를 정한다.</td>
    </tr>
    <tr>
      <th scope="row">제약</th>
      <td>지금 바꿀 수 없는 조건은 무엇인가.</td>
      <td>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좁힌다.</td>
    </tr>
    <tr>
      <th scope="row">책임</th>
      <td>누가 의견을 내고, 누가 결정하고, 누가 실행하는가.</td>
      <td>논의할 것과 실행할 것을 구분한다.</td>
    </tr>
    <tr>
      <th scope="row">가역성</th>
      <td>틀렸을 때 되돌릴 수 있는가.</td>
      <td>결정의 무게를 조절한다.</td>
    </tr>
    <tr>
      <th scope="row">검증 시점</th>
      <td>언제 다시 볼 것인가.</td>
      <td>임시 판단을 학습 가능한 판단으로 만든다.</td>
    </tr>
  </tbody>
</table>
<p>같은 자료 정리라도 보고를 위한 것인지, 인수인계를 위한 것인지, 의사결정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같은 일정 조율이라도 속도가 중요한지, 참여율이 중요한지, 책임자의 확인이 중요한지에 따라 선택이 달라진다.</p>
<p>이걸 표로 적어두면 늘 이 순서대로 판단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지는 않다. 대개는 급하게 정하고, 나중에 무엇이 빠졌는지 알게 된다. 제약을 보지 않아서 말이 쉬워졌던 적도 있고, 책임을 나누지 않아서 의견 요청과 결정 위임을 뒤섞은 적도 있다.</p>
<p>그래서 임시 판단에는 다시 볼 시점이 필요하다. 판단은 한 번 내려놓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시점에 다시 현실과 맞춰보아야 한다. 그때 처음 기준이 맞았는지, 정보가 달라졌는지, 위험이 커졌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p>
<p>이렇게 쓰고 보면 판단은 거창한 통찰이 아니라 정리의 기술에 가깝다. 아주 기본적인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기본이 부족할 때 일이 흔들린다.</p>
<p>여기서 빠지기 쉬운 극단이 두 가지 있고, 둘다 자주 경험하는 것 같다.</p>
<p>하나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니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확실한 일을 너무 확실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p>
<p>전자는 일을 멈추게 하고, 후자는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아직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되, 지금 정할 수 있는 것은 정한다. 열어둘 것은 열어두되, 실행할 것은 실행한다. 의견을 받을 부분과 결정된 부분을 구분한다.</p>
<p>그래서 좋은 판단은 나중에 다시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p>
<p>결과가 나온 뒤에는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처음부터 기준을 더 명확히 했어야 했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나중에 알게 된 정보를 알 수 없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사후 평가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판단 근거를 남겨두는 일이다.</p>
<p>왜 그렇게 판단했는가, 그때 무엇을 알고 무엇은 몰랐는가, 어떤 위험을 감수했는가. 이 정도만 남아 있으면 실패도 학습이 된다. 반대로 아무 기준 없이 흘러간 일은 결과가 좋으면 운이 되고, 결과가 나쁘면 책임 공방이 된다.</p>
<p>정답이 없는 업무에서 판단한다는 것은 완벽해지는 일이 아니다.</p>
<p>모호한 상황을 실행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일이다. 불확실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게 만드는 일이다.</p>
<p>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이해한 판단은 그런 것이다.</p>]]></content:encoded>
    </item>
  </channel>
</rss>